시론-유럽의 농정철학    ‘정책’이란 본래 가치 중립적이지 못하여 정책결정자의 ‘가치관’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기본으로 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 정책결정자의 농정철학은 과연 어떨까. 농업·농촌·농민의 본질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개방이니 세계화니 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기조와 식량안보·다원적 기능 등 농업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몰이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면 무리일까. 최근 유럽의 몇몇 나라들을 둘러보면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농정철학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물론 유럽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가 적어도 농업의 본질적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농정을 추진하고 있음은 명백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독일의 경우를 보면 정부가 앞장서서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조목조목 국민에게 알리고 있다. 예컨대 경제성장 과정에서 인플레를 억제한 사실, 농촌경관과 전통을 유지·계승해주는 사실 등 10여가지를 상세하게 정리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정부가 앞장서서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한 농업과 농민의 어려움을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정부는 자국의 농업경쟁력을 아무리 향상시킨다 하더라도 상품으로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경쟁력을 제고하면 자국의 농업이 세계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수 있고, 농민들도 이제는 스스로 경쟁력을 제고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식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농업을 그저 상품만 생산해내는 산업적 의미로만 파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환경농업, 즉 유기 생태농업은 단순하게 안전하고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다. 농민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소비자에게 안전한 농산물을 제공하는 소극적인 개념의 유기농업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인간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보존되고 생태환경이 살아 역동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기농업과 생태농업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정책도 이러한 정신과 이념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유럽도 개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넘기려는 농정의 철학이 우리와는 판이하다. 경쟁력이니 시장이니 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농업·농촌의 다원적기능 즉, 자연·생태·농업·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존’의 철학을 밑바탕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다시 한번 상고해볼 만하다. ☎031-670-3047. 윤 석 원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sukwon@cau.ac.kr